시울의 생각을 듣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설명하기 보다 일상 속에서 시울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삶의 가치와 태도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울의 생각을 듣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설명하기 보다 일상 속에서 시울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삶의 가치와 태도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울’은 가장자리를 나타내는 순우리말로 눈시울 또는 입시울(입술)로 표현이 됩니다. 지리적으로 서귀포는 우리나라 가장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이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이에요. 누구나 한 번은 따뜻한 남쪽에서, 지금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상상을 하는데 그곳이 바로 가장자리에 위치한 서귀포입니다. 그러한 관심뿐만 아니라 남들은 알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제 뜻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삶의 가장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을 때 힘들게 찾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죠. 또 가장자리는 기댈 수 있는 품 안의 따뜻함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홀로 서서 버틸 힘이 없을 때, 기대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제주 표현 그대로 ‘육지’에서만 살아왔습니다. 큰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서울과 대전, 분당에서 살고 그곳에서 진료를 하면서 도시에 익숙한 삶을 살아온 셈이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했던 사회적 지위는 이루고 있지만 점점 가족과의 추억과 시간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쁜 삶이 어느샌가 사랑을 잃게 만든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가 있던 곳에서 가장 먼 이곳 서귀포에 살고 있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그 친구의 사는 모습이 제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해서 내려왔던 서귀포는 마침 따뜻한 봄이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그 느낌이 제겐 너무나 좋았어요. 여러 지인께서 병원 개원을 위해 서귀포시 보다는 제주시를 권해주셨지만, 제주시에 개원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서귀포에서는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일들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있었고요. 그렇게해서 서귀포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여러 인생에 대해서 듣고, 희로애락을 함께 누리기도 하죠. 몇 년이 지나 새로워진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되는 분들도 있고요. 제게는 매일매일의 진료가 보람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입니다. 정신과 상담이라고 해서 항상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만 하시는 것은 아닌데요.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 한결 편안해진 마음들을 나눠주실 때 저 또한 기쁨을 누립니다. 함께 슬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슬픔에서 벗어난 분들을 보며 보람을 느끼기도 해요.
어느 날, 갑작스레 사별을 하신 젊은 부인께서 마음의 고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음을 돌리기 위해 먼 제주도로 오셨지만 떠나보낸 남편은 여전히 그분의 삶 속에 머물러 있었죠. 한동안 함께 아팠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고통을 잘 감내하셔서 마음이 차츰 회복이 되셨습니다. 그래도 잊히지 않는 아픔에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신다 했어요.
하루는 병원으로 엽서를 한 장 보내주셨는데 ‘Spain Hontanas → Carrión’ 이렇게 짧게 적혀있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생각으로 걷고 계실지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그날은 아픔이 날아가는 것을 함께 경험한 날이기도 했죠.
의예과 1학년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얼마나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지 프로이트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들고 다녔죠. 전 그때 프로이트를 처음 접했습니다. 이후 잊고 살다가 의사고시를 준비할 즈음이었어요. 문득 제 자신이 생각과 행동을 되돌아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거죠.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편했습니다. 차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아픔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 천성에 맞는 일을 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이랄까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즈음에는 정신과에 지원하는 것이 경쟁이 심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시는 경쟁보다 말 그대로 확신을 갖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안갯속처럼 다른 과와는 달리 이해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죠. 물론 지금은 항상 입는 옷처럼 이 일이 잘 맞아요.
삶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해갈수록 미디어를 통해 화려하게 보이는 것이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심리적 빈곤감을 느끼거나 타인과 삶의 의미를 비교하게 됩니다.
인생은 가장 좋은 한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좇느라 보이지 않는 의미를 찾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삶의 의미가 아닐까요.
그것은 가족이나 연인과의 사랑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이뤄가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 ‘리틀 미스 선샤인’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듯했던 가족이 갈등과 아픔을 함께 하면서 그 과정이 의미이자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제가 생각하는 삶을 잘 표현한 영화입니다.
일반적으로 혈액검사를 하거나 X-ray 검사를 통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진단 도구들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신과는 의사 자체가 진단 도구가 됩니다.
상담할 때 머릿속 한 쪽에서는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을지, 왜 그렇게 되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듣고 질문을 던집니다. 즉 환자가 이야기하는 어려움들을 그대로 들으면서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의미나 환자가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요. 빙산의 일각을 듣고 그 밑에 숨겨진 의미들을 이해하는 것이죠. 그렇게 이해를 해야 그에 맞게 약을 처방하고 상담을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 그에 맞게 약을 처방하고 상담을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진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앞에 앉아 있는 환자가 아파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 아래에 있는, 대부분이 그동안의 삶인데요, 그 숨겨진 것을 이해하는 것이에요.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나눠주세요. 통찰력 있게 자신을 들여다보시는 분들이 계세요. 반대로 많은 고민 끝에 어렵사리 병원에 왔지만 어떤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저 눈물만 흘리시기도 하고, 더듬더듬 말씀하시면서 말을 못 해 미안하다 하시는 분도 계시고, 억울하게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한탄하시는 분도 있어요.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못하고 그저 참고만 살아온 그 심정을 보고 듣다 보면 제 마음도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참척(慘慽)의 슬픔’이 있어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의 마음은 그저 옆에만 있어도 고통이 같이 느껴집니다. 이야기를 듣고 약을 처방하면서도 과연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을지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죠.. 하지만 많은 분들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샌가 잘 견디고 계시는 모습을 보게되면 저 또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세 가지입니다. 신념과 소명, 그리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변하지 않을 가치를 우선으로 여기며 마음에 새기는 것, 의사라는 직분을 맡았기에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지려는 것, 받은 사랑을 다시 주려는 것. 이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마음으로 더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시울은 가치를 평가하는 주체가 아니라 소중한 한 사람의 주어진 가치를 존중하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헬퍼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병원이기 때문에 먼저 치료 영역 안에서 이뤄집니다. 전문적인 정신과적 상담치료와 처방이 중심이 되는 치료 영역이죠.
병원 밖의 역할, 즉 지역사회에서의 역할도 있습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관계의 문제가 생기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으며, 소외된 계층의 정서적 빈곤이 발생합니다. 시울은 지역사회의 복지 관계망 속에서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의료라는 한 축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대영 의학박사, 전문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순간을 개념으로 정의하고 설명하기 보다 시울이 바라보는 삶의 가치와 태도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울’은 가장자리를 나타내는 순우리말로 눈시울 또는 입시울(입술)로 표현이 됩니다. 서귀포는 지리적으로 가장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이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이에요. 누구나 한 번은 따뜻한 남쪽에서, 지금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상상을 하는데 그곳이 바로 가장자리에 위치한 서귀포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제 뜻이 담겨있습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홀로 견디기 힘들 때 기대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제주 표현 그대로 ‘육지’에서만 살아왔습니다. 큰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서울과 대전, 분당에서 살고 그곳에서 진료를 하면서 도시에 익숙한 삶을 살아온 셈이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했던 사회적 지위는 이루고 있지만 점점 가족과의 추억과 시간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쁜 삶이 어느샌가 사랑을 잃게 만든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가 있던 곳에서 가장 먼 이곳 서귀포에 살고 있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그 친구의 사는 모습이 제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해서 내려왔던 서귀포는 마침 따뜻한 봄이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그 느낌이 제겐 너무 좋았어요. 여러 지인께서 병원 개원을 위해 서귀포시 보다는 제주시를 권해주셨지만, 제주시에 개원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서귀포에서는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일들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있었고요. 그렇게해서 이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여러 인생에 대해서 듣고, 희로애락을 함께 누리기도 하죠. 몇 년이 지나 새로워진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되는 분들도 있고요. 제게는 매일매일의 진료가 보람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입니다. 정신과 상담이라고 해서 항상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닌데요. 힘든 상황을 벗어나 한결 편해진 마음들을 나눠주실 때 저 또한 기쁨을 느낍니다.
어느 날, 갑작스레 사별을 하신 젊은 부인께서 마음의 고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음을 돌리기 위해 멀리 제주로 오셨지만 떠나보낸 남편은 여전히 그분의 삶 속에 머물러 있었죠. 한동안 함께 아팠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고통을 잘 이겨내고 차츰 회복이 되었어요. 그리고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신다 했습니다. 하루는 병원으로 엽서를 한 장 보내주셨는데 ‘Spain Hontanas → Carrión’ 이렇게 짧게 적혀있었어요. 그분이 어떤 생각으로 걷고 계실지 공감이 되었고 그날은 아픔이 날아가는 것을 함께 경험한 날이기도 했죠.
의사고시를 준비할 즈음이었어요. 문득 제 자신이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거죠.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편했습니다. 차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아픔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 천성에 맞는 일을 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이랄까요. 요즈음에는 정신과에 지원하는 것이 경쟁이 심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시는 경쟁보다 말 그대로 확신을 갖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안갯속처럼 다른 과와는 달리 이해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죠. 물론 지금은 항상 입는 옷처럼 이 일이 잘 맞아요.
삶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해갈수록 화려하게 보이는 것이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심리적 빈곤감을 느끼거나 타인과 삶의 의미를 비교하게 됩니다. 인생은 가장 좋은 한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좇느라 보이지 않는 의미를 찾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삶의 의미가 아닐까요. 그것은 가족이나 연인과의 사랑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이뤄가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 ‘리틀 미스 선샤인’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듯했던 가족이 갈등과 아픔을 함께 하면서 그 과정이 의미이자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제가 생각하는 삶을 잘 표현한 영화입니다.
일반적으로 혈액검사를 하거나 X-ray 검사를 통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진단 도구들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신과는 의사 자체가 진단 도구가 됩니다. 상담할 때 머릿속 한 쪽에서는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을지, 왜 그렇게 되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듣고 질문을 던집니다. 즉 환자가 이야기하는 어려움들을 그대로 들으면서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의미나 환자가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요. 빙산의 일각을 듣고 그 밑에 숨겨진 의미들을 이해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야 적절한 처방을 하고 상담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진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앞에 앉아 있는 환자가 아파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 아래에 있는, 대부분이 그동안의 삶인데요, 그 숨겨진 것을 이해하는 것이에요.
많은 고민 끝에 어렵사리 병원에 왔지만 어떤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저 눈물만 흘리시거나, 더듬더듬 말씀하시면서 말을 못 해 미안하다 하시는 분도 계시고, 억울하게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한탄하시는 분도 있어요. 힘든 시간들을 그저 참고만 살아온 심정을 보고 듣다 보면 제 마음도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참척(慘慽)의 슬픔’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은 그저 옆에만 있어도 고통이 같이 느껴집니다. 이야기를 듣고 약을 처방하면서도 과연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을지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죠.. 하지만 많은 분들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샌가 잘 견디고 계시는 모습을 보게되면 저 또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변하지 않을 가치를 마음에 새기는 것, 의사라는 직분을 맡았기에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지려는 것,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주는 것. 이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마음으로 더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시울은 가치를 평가하는 주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주어진 가치를 존중하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헬퍼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병원이기 때문에 먼저 치료 영역 안에서 이뤄집니다. 전문적인 정신과적 상담치료와 처방이 중심이 되는 치료 영역이죠. 병원 밖의 역할, 즉 지역사회에서의 역할도 있습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관계의 문제가 생기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으며, 소외된 계층의 정서적 빈곤이 발생합니다. 시울은 지역사회의 복지 관계망 속에서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의료라는 한 축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대영 의학박사,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