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예부터 태교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태교는 태아와 엄마뿐만 아니라 앞으로 자라서 형이나 언니가 될 아이를 위해서, 즉 이미 아이가 있는 어머니가 임신을 하게 되면 태아를 위해 음식이나 약, 여행, 운동 등 여러 가지 몸과 마음가짐, 사회적인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그 형이나 언니를 위해서도 태교를 합니다. 이미 태어난 형제를 위해서 태교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이 아닌가 생각듭니다.
어머니들은 뱃속의 아기를 가리키며 동생이라는 말을 많이 강조합니다. 한 살 터울이든, 두 살 터울이든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동생이 뱃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만무하겠지만, 그래도 어머니들은 주입식 교육마냥 동생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노력합니다. 그것은 형이나 언니가 느낄 상실감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은 아닐지요.
과거 스피츠(Spitz)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 수용되어 있던 아이들을 연구해서 정신과학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요약하자면 그가 살던 당시 고아원에 수용되어 있던 아이들은 아무리 좋은 영양과 위생 시설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병에 걸리기가 쉽고, 신체 발육이 늦으며, 유전적으로 좋은 두뇌를 받았어도 지능 발달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으로 생각한 것은 고아원은 아이의 발육을 촉진시키기 위해 자극을 주는 요인이 결여되었었고, 따뜻한 어머니 역할을 하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이들 생후 12개월까지 추적관찰하며 밝혀낸 것입니다. 즉 이 시기의 박탈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손상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이어진 연구에서 생후 6개월 이후 어떤 아이들은 이전에 명랑하고 외향적인 기질이었으나 정반대로 잘 울고, 얼마 후에는 접촉을 않고 주위로부터 철수하는 행동이 관찰되었습니다. 이후 발육지연과 함께 자극에 대한 반응 또한 뒤떨어지면서 운동이 느려지고 의욕없이 멍해지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스피츠는 이런 증상들을 통털어 ‘의존적인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사랑의 대상, 즉 어머니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태어난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어머니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는 여전히 똑같은 사랑을 주지만 물리적으로 이전과 동일한 사랑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먼저 태어난 아이들은, 특히 부모의 사랑을 크게 인식하는 두세살 터울의 아이들일수록, 부모 사랑의 상실감을 절실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가벼운 아우 타는 증세는 지금 아이를 기르는 부모나 이미 아이를 길렀던 부모는 잘 압니다. 먼저는 퇴행이 나타납니다. 이전과 달리 더 의존적이 되고 더 자기 절제를 못하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잘 먹던 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양보를 잘 하던 아이가 자기 장난감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동생보다 더 크게 우는 것은 질투와 퇴행의 복합물입니다. 부모가 힘들어지는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지요. 그러면서 동생의 행동을 모방하기도 합니다. 둘째로 흔한 것은 공격성입니다. 이전과 달리 더 화를 잘 내고 동생을 때리기도 하며 관심이 적어진 부모를 때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퇴행과 분노는 관심이 적어진 부모에 대한 상실감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니 정상적이며 자연스레 해소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심한 아우 타기는 곧 스피츠가 말한 의존적인 우울증에까지 이를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심한 상실을 경험하는 것은 흔하지 않으나, 극단적인 부모 관심의 변화는 아이에게 박탈로 인한 우울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우 타는 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부모의 한결같은 관심과 인내입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왠만해서는 병적인 상태로까지 진행하지 않으며 심리적으로 극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커서 사회생활 혹은 가족 간의 심한 라이벌리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생이 태어난 직후부터 아우 타기를 보이기 때문에 심신이 가장 피곤한 상태에서 이전과 동일한 관심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관심은 부모가 그 시기를 인내하는 것만으로도 보여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형이나 언니가 보이는 끊임없는 갈망 표현을 거절이나 타이름이 아니라 잠깐의 눈맞춤과 말투, 스킨쉽으로 반응하다보면 아이도 조금씩 표현의 강도가 낮아질 수 있습니다. 물론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이는 아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더욱 큰 기질일 경우에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심신이 지친 부모의 인내가 동반된 관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아우 탄다는 말은 심리학이 없던 우리 옛 선조들의 지혜를 담은 표현입니다. 가족이 경험하고 극복하게 되는 하나의 이정표입니다. 아우를 심하게 타느냐 덜 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려 깊은 반응과 한결같은 사랑이 중요합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